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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이야기/오스트리아 정보

<오스트리아 정보> 케른튼 주

<오스트리아 정보>

전체 9개의 연방주(Bundesländer)가 구성하는 오스트리아에서 최남단에 놓인 '케른튼(Kärnten)' 연방주는 56만 명 이상의 거주민과 950만km²에 달하는 면적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는 인구수 기준으로 오스트리아에서 여섯 번째, 면적으로는 다섯 번째로 큰 연방주인데요. 케른튼은 티롤과 잘츠부르크 주에 이어서 핵심 관광 명소에 항상 이름을 올리는데, 이 연방주의 서쪽으로 티롤 연방주가 북쪽으로 잘츠부르크와 슈타이어마크 주가 남쪽으로는 슬로베니아와 이탈리아가 위치하여 그 어느 지역보다도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경제 및 문화 교류의 활성화가 되어있는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역사

 

 

본래는 고대 이탈리아 북방에 존재하였던 갈리아인이 거주하고 있었으나 기원 450년 전 켈트족이 유입되면서 본격적인 연방주의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합니다. 이 당시 산맥으로 이루어진 터라 '케른튼'이란 명칭 자체도 켈트족이 사용하였던 '돌, 바위'를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켈트족이 본인들의 영토로 선포하고 남쪽 슬로베니아에 거주하는 부족들을 합치면서 '노리쿰'이란 왕국을 건립하지만 기원 50년 전부터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이끄는 하나의 지방령으로 편입됩니다.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된 4세기 초반부터 다양한 인종들이 이 지방령으로 이주하면서 섞이게 되는데 로마인과 더불어 슬라브계 민족이 케른튼의 통치체제를 확립하게 됩니다. 이후 과거 동유럽에서 유라시아 유목민들로 구성된 아바르 민족이 8세기경 침공을 가하자 케른튼 지방은 과거 서유럽 프랑크 왕국과 독일 남부 바이에른 공국에게 국방을 의뢰하면서 이 두 왕국의 영향력이 케른튼 내에서 확장됩니다. 이러면서 두 왕국으로 세력이 넘어가는데 10세기 초반부터 케른튼은 바에이른 공국의 온전한 일부 지역으로 여겨지게 되지요. 이 계기로 바이에른 공국의 공용어가 독일어이었던지라 자연스럽게 케른튼 지방도 독일어를 통용어로 처음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이어서 10세기 중·후반에는 바이에른 공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자주적인 '케른튼 공국'을 세우는데 케른튼 왕가의 자주적인 통치 기간 동안 성과 수도원 등의 다양한 현재 케른튼 연방주를 대표하는 건축물들이 지어지게 됩니다. 여기에 독일 바이에른 공국으로부터 분리되어 오스트리아의 선조가 된 바벤베르크 왕가가 13세기 오스트리아에서 종적을 감추며 몰락하자 합스부르크 가문이 새롭게 오스트리아 전역을 통치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본래 케른튼은 합스부르크와 무관한 슈판하임 대공이 다스렸던 지역이었고 슈판하임 대공의 공비가 바벤바르크 왕가 출신이기에 케른튼은 바벤베르크 왕가와 인연이 오히려 합스부르크 가문보다 더 깊었습니다. 아무리 바벤베르크 왕가가 몰락하였어도 케른튼의 백성들은 본인들의 혈통이 독일 바이에른 공국과 바벤베르크 왕가로부터 이어져 내려왔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기 위하여 바벤베르크 왕가를 나타내었던 문양 중 하나인 '사자'를 케른튼의 문양으로 선정하지요.

케른튼 주 (붉은색), 주 문양 (우)

14세기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와 독일 왕족으로 이루어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루드비히 4세가 합스부르크 가문에 이 영토를 헌사하면서 약 350년에 달하는 케른튼 공국은 저절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령으로 편입됩니다. 이후 합스부르크의 속국이 되면서 케른튼은 다방면에서 비참한 역사를 써 내려가는데 15세기 오스만 튀르크 제국과의 전쟁으로 지역이 쑥대밭이 되었고 16세기에 발생했던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케른튼 지역이 천주교에서 점차 개신교로 개종하는 백성들이 늘어나자 합스부르크 황실은 케른튼을 무참히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가뜩이나 케른튼 백성들은 본인들의 뿌리를 합스부르크 가문이 아닌 독일 바이에른과 바벤베르크 왕가에 두었던 터라 종교 이유로 탄압까지 일삼는 합스부르크를 피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독일 바이에른 공국으로 피난 및 망명을 떠납니다. 심지어 18세기 후반에는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의 침공으로 케른튼의 반 이상이 프랑스 영토로 귀속되고 19세기 중반에나 들어서서 케른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군주제가 도입되면서 재차 지역의 안정세를 되찾습니다. 20세기에 발발한 세계 1차 대전으로 오스트리아가 공화제를 택하면서 케른튼 역시 오스트리아의 연방주로 자리잡기 시작하지만 주변 국가와의 영토 분쟁이 잔존하였는데 케른튼의 최남단 지역의 일부를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 양도하면서 1920년에야 비로소 현재 케른튼 연방주의 모습으로 존속됩니다. 

  지리 & 경제

 

주도(都) '클라겐푸르트(Klagenfurt)'를 중심으로 총 17개의 크고 작은 도시들로 케른튼 연방주는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최남단에 위치한 터라 여러 산들이 놓여있으며 특히 케른튼의 북쪽과 남쪽으로 알프스 산맥이 펼쳐져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티롤 주와 마찬가지로 케른튼 역시 오스트리아의 알프스 산맥을 책임지고 있는 핵심 지역이지요. 케른튼의 북쪽에 위치한 '동알프스(Ostalpen)' 산맥인 '쿠르크탈러', '호헤  타우언'이란 명칭의 산군(群)이 놓여있는데 특히나 티롤 연방주와 케른튼 연방주의 경계 지점인 '호헤 타우언' 산맥에는 오스트리아 내에서 가장 높은 산인 '그로스글로크너' 알프스 산이 위치해 있습니다. 기후 역시 다양한데, 케른튼의 중·북부 지역은 낮에는 급격히 온도가 높아지고 밤에는 급랭되는 일교차가 큰 고산 기후인 것에 반하여 남부 지역은 여름에 고온 건조하며 겨울에 눈보다 비가 내리는 지중해 기후를 나타내고 극히 건조한 푄 바람 또한 자주 목격됩니다. 케른튼의 북쪽 산맥에선 다양한 암석들이 발견되는데 천연가스 및 석유와 같은 유기 물질을 내포하는 암석인 탄산연암이 채굴되기에 케른튼 연방주는 오스트리아 천연가스 산업에 조력하고 있습니다.

케른튼 산맥 지도 (좌), 주도 클라겐푸르트 중심 거리 (우)

중·남쪽 알프스 산맥인 '카라반켄', '가이탈러'에서 역시 북쪽 산맥과 유사하게 광물 마그네사이트, 철광석, 석회암, 대리석과 같은 천연자원인 광물과 암석들이 채굴됩니다. 이런 천연자원을 기반으로 케른튼의 산업이 성장하였는데 소재산업 및 기기제조업 그리고 가스업이 케른튼 경제를 앞에서 이끌고 알프스 산맥의 부지 및 목초지를 활용한 경작이 활발히 이루어지기에 농업과 축산업은 뒷받침을 해주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케른튼의 관광업 또한 무시할 수 없는데 알프스 산맥의 정경을 비롯하여 오스트리아를 상징하는 호수들이 있기에 '산과 호수의 땅'이란 별명으로 케른튼은 불립니다. 그러나 대표하는 경제 산업이 다른 연방주가 펼치는 산업 형태와 겹치는 이유로 케른튼은 경제적 특수 효과를 누리기엔 역부족인데요. 농업과 축산업은 오버외스터라이히 주에 밀리고 알프스 산맥을 이용한 관광업은 티롤 주와 경쟁하고 여러 제조업 역시 빈과 슈타이어마크에 비하여 열등합니다.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모든 분야를 골고루 아우르는 강점을 지닌 지역이지만 부정적으로 보면 특출 난 산업이 딱히 존재하지 않는 연방주이기에 케른튼의 경제력은 오스트리아 내에서 하위권에 머물고 있습니다.

  사회 & 문화

 

 

알프스 산맥과 더불어 수많은 강과 호수가 케른튼의 상징으로 여겨지는데, 단순히 자연 경관을 통해서 한 해 동안 케른튼이 벌어들이는 관광 수입은 잘츠부르크와 티롤 주에 이어서 오스트리아 내에서 세 번째로 높습니다. 세계적으로 이름 난 호수인 '어터제(Wörthersee)'와 '슈테터제 (Millstätter See)'가 케른튼 관광의 핵심축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뵈어터제는 케른튼에서 가장 큰 호수이고 주도 클라겐푸르트와 경제 지구 필라흐 중앙에 놓여있는 관계로 이 두 대도시를 이어주는 통로 역할로 활용됩니다. 허나 이런 자연 경관 및 피서지는 주로 봄과 여름에 국한되어 있고 설상가상으로 케른튼의 위치한 알프스 산맥은 유독 겨울에 폭설과 바람으로 등산 및 출입이 빈번히 금지되기에 다른 연방주에 비해서 '한철 장사'로 일축됩니다. 노벨 문학상을 수여 받은 작가 '한트케(Peter Handke)'와 더불어 독어권 근·현대 문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소설가이자 서정시인인 '바흐만 (Ingeborg Bachmann)' 역시 케른튼 출신이고 이를 기념하며 설립된 독어권에서 권위있는 문학상인 '바흐만 문학상'이 개최되는 지역이기에 오스트리아 예술 분야에서 케른튼의 명성은 여타 지역에 비해서 크게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뵈어터제 (좌), 밀슈테터제 (우)

오스트리아 내에서 케른튼은 우리나라의 충청도처럼 '행동이 느리고 굼뜬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이다'라는 편견 아닌 편견을 가지고 있는데 이들의 상대적으로 느릿느릿한 사투리와 겨울에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따뜻한 지역이기에 산과 호수가를 거닐면서 여유를 만끽하는 케른튼 사람들을 빗대어서 생긴 선입견입니다. 그러나 이런 여유롭고 느릿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케른튼은 소수 민족과의 분쟁으로도 유명한 연방주인데요. 세계 1차 대전이 끝나고 케른튼은 승전국의 조약에 따라서 영토 분배에 관한 국민투표를 거행합니다. 이 당시 케른튼 최남단 지역에는 상당수의 유고슬라비아 및 슬로베니아 출신 국민들이 거주하고 있었기에 케른튼 최남단 지역 전체를 슬로베니아령으로 귀속시키길 원하였습니다. 오스트리아와 슬로베니아 양국이 케른튼 최남단 지역을 두고 마찰을 빚자 1920년 케른튼에 거주하는 슬로베니아 국민들을 상대로 투표를 실시합니다. 근소한 차이로 최남단 지역에 거주하는 슬로베니아 인들이 오스트리아령에 머무는 것에 더 많은 찬성표를 던지면서 이들의 국적 또한 오스트리아인으로 남기로 결정됩니다. 이런 이유에서 케른튼 최남단은 도시 및 지역명이 '독일어와 슬로베니아어' 두 개의 언어로 표기되는데 독일어를 사용하는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슬로베니아 소수 민족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이런 2개 국어의 통용을 반대하자 1970년대 큰 분쟁이 일어날 뻔하였습니다. 지금은 무마되어 2개 국어로 사용 및 표기가 가능하지만 이를 반대하고 무시하는 경향이 남아있어 오스트리아와 슬로베니아인 사이의 묘한 긴장감과 마찰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