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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이야기/오스트리아 정보

<오스트리아 정보> 오스트리아 문학사 -4부-

<오스트리아 정보>

2차 세계대전이 끝난 20세기 중반 이후로 오스트리아의 문학은 저명한 문호들의 망명으로 깊은 침체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 당시의 오스트리아는 패전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문학을 비롯하여 미술과 음악에서도 인재들의 국외 유출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예술 전반에서 공백기에 봉착한 오스트리아는 2차 대전의 승전국인 미국이 주도한 유럽의 복구 및 반공산화 계획인 일명 '마셜 플랜 (Marshall Plan)'으로 국가가 큰 재개발에 들어가게 되는데요. 이에 예술분야 역시 점차 활기를 되찾기 시작합니다. 나치당의 핍박으로 망명을 떠났던 유대인계 문호와 비 독어권 문예인들이 오스트리아로 귀환하면서 문학의 공백기를 메우는데, 오스트리아 정부 역시 이들에게 동조하여 나치당의 의하여 폐기 처분된 문학들을 복구하기 시작합니다. 잃어버렸던 문학들을 재발굴하면서 발견한 문호들 중 한 명이 바로 '프란츠 카프카 (Franz Kafka)'였는데, 카프카식 특유의 기괴하고 염세적인 세계관으로 유럽을 넘어 미국에까지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범국가적 지원으로 오스트리아 문학 분야에서 유독 극작가의 활약이 눈부셨기에 현재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정기 공연인 '브레겐츠 축제극 (Bregenzer Festspiele)'과 특히 오페라로 유명한 '잘츠부르크 축제극 (Salzburger Festspiele)'이 재차 열립니다. 나치당의 횡포로 오로지 인종 우월주의적이고 반민주적인 작품들만 다뤘던 오스트리아의 극장가들 또한 극작가들에게 다양한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정치와 특정한 사상으로부터 자유롭게 본인만의 예술적 가치를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되었는데요. 극장가가 자유로워지니 '카바레' 형식의 풍자극과 시사극들 역시 본인들의 개성을 살리면서 오스트리아 국민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습니다. 

극작가 및 소설가 베른하르트 (좌), 소설가 옐리니크 (우)

예술 분야 전반에 걸쳐서 행해졌던 검열이 해제되면서 특히나 문예인들의 전체적인 글쓰는 특색이 비형식적으로 전화되기 시작합니다. 언어의 다채로움과 다양성을 강조하면서 비유와 의미를 중요시하는 수사적인 요소를 문학에서 점차 배제시키는데, 특히 사람의 말은 음성과 문자로 이루어져 있고 의미를 전달하는 역할 외에 표면적인 청각성과 시각성 또한 내포하기에 이런 언어의 표면성을 부각하는 작품들이 하나둘씩 오스트리아에서 각광을 받습니다. 과거의 운율과 음조와 같은 고리타분한 형식을 타파하면서 유독 '시가(歌)'의 형태가 변곡점을 맞게되는데 작가와 시인 본인들만의 작시법으로 시의 청각적이고 시각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구상시 (Konkrete Poesie)'가 하나의 주류로 자리매김합니다이런 비형식적이고 주관성이 뚜렷한 문학 형식이 대세고 정부의 검열이 사라졌다 할 지라도 딱 한 가지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예술인들을 상대로 규제하는 항목이 있었는데, 바로 '오스트리아의 독일 나치당 연루'에 관한 점이었습니다. 나치당은 독일에서 출범하였기에 민족 대학살과 2차 세계 대전의 주범은 오로지 독일이란 나라 하나뿐이라는 사상을 오스트리아 정부는 국민 상대로 펼치기 시작하였는데요.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협박으로 2차 세계 대전 당시 강제 합병이 되어 참전하였을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고 오스트리아 역시 독일 나치의 피해자라고 끊임없이 주장하였습니다. 이를 부정하는 모든 요소들을 오스트리아 정부가 철저히 규제하였기에 문학 역시 검열을 피하고 싶으면 정부의 주장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극작가와 소설가로 알려진 '베른하르트 (Thomas Bernhard)'가 이러한 금기를 무시하고 본인의 작품에서 2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의 피해자 행세를 과감없이 비판하고 오스트리아 또한 전쟁에 공조하였다고 표명하는데, 이는 베른하르트의 극작품인 '헬덴광장 (Heldenplatz)'에 두드러져 나타납니다. 작품에서 유대인계 오스트리아인의 삶을 그리면서 이들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이 순수 오스트리아인들의 전쟁 미화와 차별로 인하여 더욱 가증된다면서 오스트리아의 책임 전가와 무관심을 베른하르트는 노골적으로 지적합니다. 심지어 이 작가의 극작품이 1980년대에 극장에서 상영되면서 큰 논란을 빚는데요. 국가 선동과 역사 왜곡이라는 누명을 작가에게 뒤집어 씌어 상영 중지를 목표로 하였으나 '헬덴광장'이란 작품이 워낙 유럽 전역에서 유명하였고 이런 베른하르트의 올바른 역사 인식을 오스트리아 시민들 또한 지지하였기에 작품이 중지되는 일은 벌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베른하르트의 영향으로 오스트리아 정부는 물론 못마땅하게 여기기는하지만 더 이상 '나치당 연루'에 관하여 예술을 통제하는 행위까지 철회하면서 오스트리아 문학은 근 150년간 이어온 검열과 규제로부터 온전히 벗어나게 됩니다. 이렇게 오스트리아 근·현대 문학은 시대 비판적인 내용을 다루는 작가들을 통하여 발전하는데, '한트케 (Peter Handke)', '바흐만 (Ingeborg Bachmann)'을 비롯하여 노벨 문학상을 수여받은 소설가 '옐리네크 (Elfriede Jelinek)' 역시 오스트리아 과거사, 사회의 부조리, 고정관념으로 인한 암묵적인 차별을 논하면서 세계적으로 오스트리아 문학의 입지를 다집니다.  

"독일과는 다른 오스트리아만의 독창성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에서부터 시작된 오스트리아 문학에 관한 연구는 19세기 초반부터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다양한 문제점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중 대표격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바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는 '다민족 국가'였다는 점인데요. 다양한 인종과 여러 국가들을 통치하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이기에 '오스트리아 문학'이라고 단정짓는 요소들이 매우 불투명하다는 의미입니다. 오직 '독일어'로 되어있는 작품만 오스트리아 문학으로 여겨야 할지 아니면 '헝가리어, 체코어'등의 한때 합스부르크령이었던 여타 동유럽 국가의 언어로 쓰여진 작품들 역시 오스트리아 문학으로 편입시킬 수 있는 건지에 대한 의문을 답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주장인데요. 여기에 오스트리아 작가가 독일어로 작성한 작품의 상당 부분이 실지로 독일 문학의 영향을 받았고 심지어 이들 작품이 독일에서 더 많이 소비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오스트리아 문학의 정체성'을 더욱 모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