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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이야기/오스트리아 정보

<오스트리아 정보> 오스트리아 문학사 -3부-

<오스트리아 정보>

1914년 합스부르크 황실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조직단의 의해서 암살당한 후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알리며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합니다.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의 문호들은 전쟁을 옹호하고 조국을 위한 글들을 기고하라면서 당국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압박을 당합니다. 대부분의 작가 및 소설가들은 유명세에 따라서 본인의 운명이 결정되었는데요. 이름이 알려진 문호 같은 경우 관청이나 사령 본부에서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일으킨 1차 세계 대전을 국민들 상대로 정당화 및 합리화시키는 글들을 작성하는 반면에 무명의 작가들은 징병되어 전쟁터 최전방으로 끌려가 총알받이로 희생당합니다. 아무리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에서 이런 선전 활동에 강제성을 부여하였다 할지라도 상당수의 문호들은 당국의 불만과 불평이 없었고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활동에 임하는데요.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극작가인 '호프만스탈 (Hugo von Hofmannsthal)'과 시인 '릴케 (Rainer Rilke)'를 비롯하여 당시 이름난 문호들의 친정부적인 행동이 본인들 경제 활동에 큰 기여를 하게 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합스부르크가 다스리고 있었던 동유럽 국가들의 문예인들은 전쟁을 반대하고 합스부르크를 비난하는 글들이 난무하였는데요. 동일한 합스부르크령이라 할지라도 독어권 진영에서는 친정부적인 작품과 비독어권 진영에서는 반전을 표방하는 글들로 인하여 서로 간의 '문학적 대립'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던 시기가 20세기 초반이었지요.

극작가 호프만스탈 (좌), 소설가 츠바이크 (우)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주축으로 이루어진 동맹국이 1918년 항복을 선포하면서 오스트리아는 다방면에서 난국으로 치닫기 시작합니다. 패전으로 인하여 헝가리 왕국과 이중 군주 체제를 유지하였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는 붕괴되고 동유럽의 절반 이상을 호령하였던 오스트리아는 동유럽 국가들이 하나 둘씩 독립해나가자 졸지에 소국으로 전락합니다. 이에 더하여 군주 체제를 폐기시키고 공화제를 도입하면서 합스부르크 황실은 껍데기만 남은 문화적 상징물로만 여겨지게 되는데요. 패전과 합스부르크 황실의 패망으로 인하여 전쟁을 옹호하였던 문호들은 정신적으로 대혼란에 휩싸입니다. 이제까지 본인들이 열정적으로 표방하였던 '국수주의'가 모두 허망해지자 정체성의 붕괴와 꿈을 잃은 허무함으로 '호프만스탈'과 소설가 '로트 (Joseph Roth)'같은 문호들은 비애에 젖은 냉혹한 현실을 바라보기 시작하는데요. 이런 이유에서 전쟁 후 대부분의 이들 작품들은 합스부르크를 마치 일그러진 영웅으로 표현하는 동시에 휘황찬란하였던 과거를 인상적으로 회상하며 갈망하는 내용을 주로 담고 있습니다. 공화제를 도입한 20세기 초반의 오스트리아는 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하면서 정치적 성향이 보수적이고 종교색이 짙었던 대부분의 오스트리아 작가들과 견해 충돌로 이어지는데요. 다수의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사회주의를 지지하였기에 아직까지 과거 연민에 빠져있는 오스트리아 문예인들의 작품이 피부로 와닿지 않게 됩니다. 물론 이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를 반대하고 비판하였던 작품들도 출판되었지만 주류로 자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기에 작품 판매가 줄어들고 생계를 부지하기가 어려워지자 '로트'와 같은 문예인들은 신문에 '문예란(Feuilleton)', 즉 문화·예술에 관한 비평글들을 기고하면서 사례비를 받는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1930년대에 진입하면서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독일이 독일에서 유대인과 민주체제 옹호자들 상대로 대규모 핍박을 가하면서 상당수의 독일 출신 문호들이 오스트리아로 망명을 신청합니다. 하지만 나치당이 점점 오스트리아에게도 무력을 행하기 시작하면서 두 나라의 강제 합방이 이루어지자 오스트리아도 안전지대에서 벗어나는 징조를 보입니다. 이에 오스트리아에 망명을 신청하였던 독일 출신 문호들은 대부분 영국과 미국으로 방향을 돌렸고 심지어 오스트리아 문예인들도 이들과 행로를 공유하지요.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수필(Essays)과 중·단편 소설 (Novellen) 작가인 '츠바이크 (Stefan Zweig)' 본인 역시 유대인이었기에 브라질로 향하는 망명길에 오르면서 유대교적 신념과 반 나치주의적 사상을 담은 오스트리아 '명 문학 (Exilliteratur)'의 큰 역할을 맡기 시작합니다. 

시인 크라머 (좌), 작가 카네티 (우)

1939년 2차 세계 대전이 나치 독일로 인하여 터지기 일보 직전에 오스트리아는 앞서 언급한 '망명 문학'의 출판과 소비를 엄격히 금지합니다. 나치당은 잘츠부르크를 중심으로 오스트리아 내에사 나치당에 반기를 들고 자유 민주 체제를 도모하는 움직임들을 샅샅이 조사하면서 배제시키기에 혈안이 되어있었습니다. 이러한 문학을 소비하고 만드는 사람 모두를 대상으로 막대한 처벌이 시행되었으며 언론통제 및 검열로 인하여 작품들과 문서를 태우는 행위인 분서 또한 빈번히 벌어졌습니다. 망명 문학의 선두 주자였던 '츠바이크'의 수필과 중편 소설들을 비롯하여 서정시로 유명한 시인 '크라머 (Theodor Kramer)'와 빈에서 활동하였던 작가 '카네티 (Elias Canetti)'의 작품들 모두 '제1 분서 대상 목록'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해외로 망명을 성공하지 못한 문예인들은 목숨이 위태로우니 나치당이 요구하는 '문학 형식'을 따를 수밖에 없었는데요. 나치당이 오스트리아 내에서 펼치는 문학 형식은 두 가지로 요약되었는데, 하나는 '책 내용에 그 어떠한 사상도 내포하지 않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아리아 민족의 우월한 혈통주의 및 아리아 민족의 민생을 일방적으로 미화시키는 행위'로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문학인들을 상대로 하는 강압적인 규율은 연극과 카바레 같은 시사극에도 미쳤지만 특이하게 내용을 나치당 비위에 맞춰서 각색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연극과 시사극은 이 당시 가장 활성화가 되었지요. 이로써 박해를 받는 문학인들 대부분이 이러한 연극 대본을 창작하면서 본인의 경제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로 자리매김합니다. 나치당의 횡포로 오스트리아를 상징하였던 문예인들 대부분이 해외로 망명을 하였거나 아니면 사형을 당했기에 20세기 중반부터 오스트리아의 문학 여타 유럽 국가들의 비하여 유독 빛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4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