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스트리아 이야기/오스트리아 정보

<오스트리아 정보> 오스트리아 문학사 -2부-

<오스트리아 정보>

인간 중심의 사고를 뒷받침으로 발전한 인본주의와 마리아 테레지아 대공이 펼친 계몽주의적 정책으로 18세기까지 오스트리아 문학에 행해졌던 엄격한 검열이 사라지면서 오스트리아의 문학도들은 국가와 종교의 규율로부터 벗어나 세속적이고 자주적인 창작 활동을 이어갈 수 있게 됩니다. 19세기 독일을 포함하고 전 독어권 문학을 대표하였던 '만주의(Romantik)'는 특이하게도 오스트리아내에서 유일하게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데요. 이는 독일식 문화와 정서라는 명목 아래에서 오스트리아의 예술인들과 문학도들이 배타적인 성향을 보였고 낭만주의를 대신하여 정형화된 예술적 형태를 지향하는 오스트리아식 '전주의(Klassizismus)'와 더불어 '더마이어(Biedermeier) 양식'이 오스트리아 예술인들로부터 각광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비더마이어 양식은 프랑스 나폴레옹이 다른 유럽 연합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19세기 초반부터 오스트리아 문학을 상징하는 정서로 자리매김하는데, 막대한 검열로 인하여 오로지 종교와 귀족들 중심으로 창작되었던 오스트리아 문학은 일반 백성들의 삶과 애환 다루는 문학으로 전환됩니다.

극작가 네스트로이 (좌), 그릴파르처 (우)

민중적이고 전원적인 정서를 앞세우는 비더마이어 양식은 그러나 오스트리아 함스부르크 황실에는 눈엣가시로 비춰지기 시작하는데요. 평민들의 한가로운 일상과 농부들의 농촌 생활을 주제로 시와 소설들이 출판되자 이는 합스부르크 황실의 군주 정치를 반대하고 민주 체제를 도모한다면서 비더마이어 양식을 따르는 문학도들의 탄압이 이어집니다. 이들이 작품에서 표현하는 서민 계급의 삶은 합스부르크 황실에게는 모두 비판과 풍자적인 요소로 다가왔기에 모두 '선동 분자'로 낙인 시켜 버리는데요. 비더마이어 양식을 대표하는 오스트리아의 극작가 '네스트로이 (Johann Nestroy)'와 '그릴파르처 (Franz Grillparzer)'와 같은 문학도들의 작품은 하루아침에 검열 대상으로 올라가면서 유통과 소비 모두를 엄금하는 금서로 규정받게 됩니다. 그렇지만 오스트리아의 일반 서민들 사이에 퍼질 대로 퍼진 비더마이어 양식 문화는 암암리에 성황하였고 이를 공개적으로 억압하는 합스부르크 황실에 향한 일반 백성들의 분노가 나날이 커져갔습니다. 이런 일반 서민들의 분노는 19세기 중반 대규모 가뭄이 전국을 덮치면서 본인들의 일상이 황폐화되자 폭동으로 이어지게 되는데요. 합스부르크 황실이 위치한 오스트리아 빈에서 폭동이 더욱 거세지자 황실은 일반 서민들과 타협점을 찾기 시작하면서 황실은 고위 관료들을 모조리 해임시키고 시민 대표단과 회의를 열어 농민 해방을 약속합니다. 이제까지 귀족들의 몸종이나 다름없었던 농민들이 자유로운 몸이 되면서 본인만의 농업을 이끌어 나갈 수 있게 되었기에 이 폭동은 '3월 혁명'이라 불리면서  오스트리아 역사상 처음으로 군주 체제에서 민주 체제로 넘어가는 다리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 계기로 탄압받던 오스트리아 문학도들 역시 검열 대상에서 제외되고 이들의 작품은 단순히 '민중적이고 전원적인 정서'에서 온전한 '민주 체제'를 갈망하는 주제들을 반영하기 시작하는데요. 이를 계기로 비대칭적인 사회계층이 만든 도덕적 판단과 자기 주관적인 논리를 단념하면서 온전히 서민의 삶을 더욱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민중적 실주의(Bürgerlicher Realismus)' 성향으로 오스트리아 문학은 넘어가게 됩니다. 

극작가 바르 (좌), 시인 트라클 (우)

19세기 후반과 20세기 극초반 오스트리아는 정신적으로 암흑기를 보냅니다. 경제 공황을 시발점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군주 체제가 민주화를 추종하는 백성들로 인하여 흔들리기 시작하는데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자체가 다민족 국가이기에 서로 다른 인종과 사상으로 인한 문화 충돌이 만연하게 됩니다. 이런 다방면에서 암울한 시기를 반영하듯 오스트리아 문학 역시 한편에서는 현실과 자아를 부정하는 작품들이 나오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순수 과학에만 입거하여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연주의(Naturalismus)'를 따르는 문학도들이 활동하기 시작하지요.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를 지나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작가 활동을 한 '바르(Hermann Bahr)'는 본인이 직접 배우고 느꼈던 경험들을 토대로 오스트리아식 자연주의를 설파합니다. 작가 바르를 통해서 설립된 오스트리아식 자연주의는 합스부르크 전역에서 문학을 넘어 다른 예술 분야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면서 '비엔나 ·현대 예술 (Wiener Moderne)'이 탄생하게 되는데요. 낭만적이면서도 암울하고 이성적인 현실을 반영하는 '비엔나 근·현대 예술'은 문학에서 '바르'와 '호프만스탈'을, 미술에서 '클림트'와 '코코슈카'를, 음악에서 '쇤베르크'와 '말러'를 통하여 진가를 발휘하게 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습니다. 현재 빈을 대표하는 커피집인 '카페 쎈트랄 (Café Central)'에서 젊은 오스트리아 문학도들이 모여서 서로 문학적 견해와 작품을 소개하는 문화가 발전하면서 '비엔나 카페 문학(Wiener Kaffeehausliteratur)'이 탄생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는 소설보다 유독 '서정시(Lyrik)'의 가치가 높았는데, 초현실성을 부정하고 염세적이고 이성적인 세계관으로 유명한 작가이자 시인 '릴케(Rainer Rilke)' 역시 '비엔나 카페 문학'과 '근·현대 예술'을 대표하는 인물로 거듭납니다. 이 외에도 '오스트리아식 카바레(österreichisches Kabarett)'란 시사 및 풍자극 역시 주류 중 하나로 자리매김 하지요. 오스트리아식 자연주의를 표방하는 비엔나 근·현대 예술은 20세기 초반 프랑스와 독일 미술에서의 '유겐트스틸(Jugendstil)'이란 양식을 접하면서 '현주의(Expressionismus)'로 넘어가게 되는데, 작가 자신이 몸소 겪은 경험과 감정을 간결하고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미술 형태를 표방하는 문학이 발전합니다. 특히 시인 '트라클(Georg Trakl)'은 본인 서정시에 미학과 윤리적인 주제를 '자아분열, 두려움, 오스트리아 제국의 몰락'에 빗대어 묘사하면서 오스트리아 문학의 표현주의의 시작을 알립니다.

-3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