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정보>
본격적으로 오스트리아 문학의 대한 연구는 한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되었습니다. 19세기 초반 오스트리아의 역사학자와 문학도들은 이전까지 오스트리아의 문학은 단지 독일 문학의 하위 부류로만 여겨졌던 현실에서 "과연 오스트리아만의 특별함은 있는가?"라는 의문을 품기 시작합니다. 독일과 '동일한 언어, 공통된 역사, 유사한 문화'를 가진 유일한 국가인 오스트리아는 독일과는 반대로 '다민족' 국가였는데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황실이 다스렸던 지역은 전체 동유럽의 절반 이상이었고 심지어 한때 헝가리와 제국을 공유하는 이중 국가체제였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와 언어들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다민족이기는 하였으나 독일어를 모국어를 사용하는 합스부르크 같은 경우 윗 나라 독일과의 문화적 교류가 본인들이 다스리는 여타 동유럽 국가들보다도 압도적으로 높았는데요. 이런 이유에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문화는 독일과 동일시되는 경향이 상당히 짙었습니다. '독일과 차별되는 오스트리아만의 정체성'에 대한 갈망이 19세기 초반 오스트리아 내에서 극에 달하였고 이런 의문점을 해소하기 위하여 오스트리아 문학을 선두주자로 들고 파기 시작하지요.
8세기 중반 게르만어에서 '고대 표준 독일어 (Althochdeutsch)'가 파생되면서 독일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문학 역시 발을 내딛기 시작합니다. 오스트리아 중세 초기인 8세기부터 12세기까지의 문학은 오로지 입으로만 전해내려오는 구비문학이 전부였는데요. 문화와 교육의 중심에는 수도원과 성당이 있었기에 이런 구비문학이 대부분이 시로 구성되어 있었고 다루는 주제 역시 종교적인 예식과 영웅의 전기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었습니다. '아바 (Ava von Göttweig)'라는 이름의 시인이 오스트리아 중세 초기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중 한 명으로 뽑히는데 이유는 당시 남성들에게만 허용되었던 교육과 문화생활에서 최초로 탄생한 여성 시인이었기에 큰 파란이 일었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이 여성 시인이 창작한 시들이 대부분 종교적인 예식과 관련되어 있었기에 오스트리아 뿐 아니라 독일 내에서도 이 시인이 지니고 있는 상징성이 대단했습니다. 12세기부터 15세기에 해당하는 오스트리아 중세 후기 문학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궁정 문학(Höfische Literatur)'이 주를 이루었기에 아서왕과 같은 영웅 서사시와 더불어 다양한 종교시들이 귀족과 군주들을 위하여 창작되었습니다. 이에 더해 귀족간의 연애를 다루는 서정시에다가 선율을 입혀 가곡식으로 만든 연가(戀歌)인 '민네장(Minnesang)' 또한 독일과 오스트리아 중세 후기 문학에 큰 역할을 차지하지요. 허나 독일과는 차별되게 오스트리아 내에서는 예수의 고난과 핍박을 다루는 종교시를 토대로 만든 연극인 '수난극(Passionsspiele)'이 '민네장'과 함께 당시 오스트리아 문학의 양대산맥을 이루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아 오스트리아 내에서 인간의 가치를 중시하는 '인문주의(Humanismus)'적인 사상이 16세기부터 점점 떠오릅니다. 영웅 서사시와 종교적이고 귀족중심적인 '궁정 문학'에서 애환과 연모와 같은 보편적인 인간이 느끼는 감정을 주제로 내세우는 '인본 문학 (Humanistische Literatur)'으로 오스트리아의 문학은 탈바꿈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인본 문학의 중심에 있었던 빈대학교의 수사학 교수이자 시인인 '첼티스(Konrad Celtis)'가 서민들의 일상과 연애를 다루는 시를 창작하면서 오스트리아의 인본 문학은 한층 발전하지요. 17세기에 접어들면서 오스트리아는 페스트와 콜레라 같은 질병에 더하여 오스만 튀르크 침공으로 비극과 재난을 연속적으로 겪게 되는데, 이런 총체적 난국으로 인해 인본적인 사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과 신', '육체와 영혼'을 온전히 분리해서 바라보는 '이원론(Dualismus)'적인 사상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여기에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고전주의의 영향을 받아 오스트리아식 '바로크 문학'이 탄생하게 되는데요. 대체적으로 천주교를 지향하는 오스트리아였기에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을 비판하고 희화화하는 내용들을 담은 시와 소설이 주축이 되면서 '인간은 항상 어리석고 인생은 헛되다'라는 염세적 허무주의가 오스트리아 바로크 문학을 대표하였습니다. '소네트(Sonette)'와 같이 운율을 중요시하는 정형시의 형태가 유행하였고 현세를 중심으로 다루는 시와 소설을 토대로 하는 '연극(Drama)' 또한 오스트리아에서 각광을 받기 시작하지요. 허나 이런 연극과 문학들이 각광을 받는다 할지라도 합스부르크 황실에서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았기에 당시 오스트리아 문화·예술계에 행해지는 검열이 빈번했습니다. 18세기 마리아 테레지아 대공이 다스리면서 종교를 국가 밑으로 두는 과감한 개혁으로 교육을 넘어 문화·예술 분야에 미치는 검열이 점차 완화되는데, 이 계기로 오스트리아 바로크 문학은 검열이 줄어들면서 더욱 자극적이고 세속적인 내용을 다루는 계몽주의적 문학이 발전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보마르셰의 '피가로의 결혼'같이 너무 노골적으로 국가와 종교를 조롱하고 시민들을 선동하는 내용을 다루는 문학들은 여전히 금서로 치부되었습니다. 무겁고 종교적인 내용에서 가볍고 세속적인 주제로 문학이 바뀌면서 오스트리아 내에서 백성들이 책과 시를 접하려는 움직임이 많아지자 출판사들 역시 큰 호황을 누리며 우후죽순으로 생기기 시작합니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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