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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이야기/오스트리아 정보

<오스트리아 정보> 오스트리아의 종교와 세금 정책

<오스트리아 정보>

제가 처음 오스트리아에서 거주하게 되었을 때 의아하게 생각했던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오스트리아에 있는 현지 교회나 성당을 가서 '신자'가 되려면 매년 본인의 직장에서 벌어들이는 연봉의 1.1%에 준하는 '종교세'를 강제적으로 지불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종교세'를 '교구 협회'에 지불하는 것으로 오스트리아 현지에서는 '성당 및 교회 회비 (Kirchenbeitrag)'라는 명칭으로 불리는데요. 일반 신도 외에도 그 교구를 이끄는 목사 및 신부 또한 마찬가지로 본인의 연봉에서 약 '9%'에 달하는 금액을 의무적으로 지불해야만 '성직자'로서 활동이 가능합니다. 특이하게 교회가 아닌 국가가 이런 '종교세'에 개념을 처음 만들었고 현재까지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심지어 이 회비를 국가에 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교구의 영 및 동'의 목적으로만 쓰인다고 하니  "종교와 신앙생활의 자유가 있는 오스트리아가 날강도처럼 무슨 헌금을 강제로 걷어가나?"라는 의문점이 생겨서 처음에는 굉장히 저를 갸웅뚱하고 불쾌하게 만들었는데요. 신기하게도 이러한 종교세 형태의 '회비 강제 징수'라는 전통이 오스트리아내에선 상당히 깊고 '기독교 역사의 뿌리'를 두고 있는 유럽에서도 오로지 오스트리아만의 독특한 개념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요세프 2세와 천주교

 

 

18세기 말까지 오스트리아에서 사회 전반에서 유일무이한 영향력을 끼쳤던 천주교회는 현재 우리나라와 미국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간섭이 불가능한 자주적인 단체'로 여겨졌고 '토지' 및 신도들의 '십일조' 형태인 '자본'으로 천주교회가 운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자본 형태로 천주교회가 운영되니 과거에서부터 물려받은 '넓은 토지'와 '막대한 부'를 가지고 있었던 천주교회가 한 나라에 미치는 권력과 영향력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이를 반대하였던 대군주 '마리아 테레지아', 특히 그의 아들 '요제프 2세 황제'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에서 펼쳤던 정책인 '주택법 및 교육 개정'을 통하여 민심을 얻어 당시 천주교회의 '운영 방식'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칩니다. 그리고 이는 본인들 자본으로 '돈 장사, 땅 장사'나 하는 천주교회에 매우 불리하게 작용이 되었는데, '봄, 신, 육'이라는 본래 천주교가 지녀야 할 '목적'의 잣대로 이를 행하지 못하는 '성당과 수도원'들은 요제프 2세 황제로 인하여 '직위'가 박탈되었고 해체되었습니다. 이에 더해 천주교회가 소지하고 있었던 '자본과 토지'들을 국가로 환원하여 '종교 자금 (Religionsfonds)'이라는 명칭으로 나라에서 관리하는 '국가 예산'의 형태로 만듭니다. 그리고 이런 어마어마한 '종교 자금'을 황제는 오로지 '성직자 및 건물 관리'에만 배분하였고 18세기 말 천주교뿐 아니라 국가에서 인정을 하여야 '성직자'가 되었기에 천주교회는 더더욱 국가에 의지할 수 밖에 없어지는데요. 이러한 황제의 정책으로 천주교가 본인들의 목적과 불일치한 곳에는 투자를 할 수 없으니 오스트리아 내에선 오히려 성당이 더욱 많이 지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건축된 성당들은 '국립 성당 (Staatskirche)'이란 새로운 공공단체의 개념으로 '봄, 신, 육'에만 열중하는 기관으로 변모되지요. 이로 인하여 과거의 신도들이 강제적으로 성당에 지불하였던 '십일조'는 자발적인 형태로 바뀌는 동시에 '종교 자금'은 국가에서 관리되기에 천주교회의 남용은 종적을 감추게 되지요.  즉, 이런 요세프 2세의 '계몽적 절대주의' 정책은 신도들이 본인들의 경제력과 상관없이 떳떳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여 주었고 천주교는 본래의 목적을 되찾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자리매김합니다.

 

 

  히틀러와 현재의 기독교

 

 

그러나 20세기 초중반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정권을 거머쥐자 이들은 요제프 2세가 펼쳤던 '종교 자금 정책'을 퇴색시키기 시작합니다. 본래의 정책을 '성당 회비 (Kirchenbeitrag)'이란 명칭으로 바꾸고 국가에서 관리하기에 신도들에게 십일조 지출의 강제성을 다시 부여하고 '하나님의 뜻을 펼치기엔 자금이 필요하다'라는 명목 아래에서 나치당은 그 외의 회비를 무지막지하게 올립니다. '돌봄, 헌신, 교육'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하는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린 '종교 자금'으로 나치당은 무기를 만들고 군대를 늘리면서 본인들의 입지를 더욱 굳건히 다집니다. 만약 요제프 2세 시절에는 천주교가 부패하였다면 20세기 초중반에는 국가가 부패한 상황으로 역전된 것이지요. 나치당은 성직자들의 목에 총과 칼을 들이대며 이러한 정책에 대하여 오스트리아 천주교 및 개신교로부터 막무가내로 찬성을 얻어내고 이를 반대하였던 추기경, 목사, 신부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다'라는 신성 모독죄로 사형 또는 직위를 박탈시켜 추기경이 동네 거지만도 못한 생활을 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독일과 오스트리아 내에서 나치당을 반대하다 직위 박탈을 당하고 순교한 수천 명의 성직자들의 희생이 비로소 나치당이 패전하면서 빛을 발하지만 한 가지 문제에 직면합니다. 바로 천주교의 '종교 자금'이 나치당의 횡포로 없어졌기 때문인데요. 나치당은 몰락하였지만 졸지에 빈털터리 신세가 된 오스트리아 천주교는 본인들의 교구를 이끌기가 불가능해지자 국가와 협상을 합니다. 협상의 내용은 나치당 시절에 있었던 '성당 회비'를 유지하되 신도들은 매년 본인의 수입에 따라서 일정 금액 '성당 회비'를 의무적으로 부담하는 형태로 바꾼다는 것이었지요. 그밖에 차이점은 과거에는 오로지 하나의 기관, 즉 국가면 국가, 천주교회면 천주교회만이 모은 '성당 회비'를 관리하였다면 권력을 분배하기 위하여 '국가와 종교'가 동시에 관리하는 민사법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형국이 되는데요. '성당 회비'를 천주교회 또는 개신교가 독자적으로 활용을 할 수는 있으나 국가 또한 관리하기에 본래의 목적인 '돌봄, 헌신, 교육'외에 사용할 수 없고 이와 동시에 국가는 '성당 회비 비용'을 인위적으로 나치 시절처럼 변경할 수 없게 법으로 규정하였습니다. 물론 '의무'이기는하지만 회비 부담률이 연봉의 '1.1%'라 그렇게 높지는 않고 국가가 동시에 관리하기에 천주교 및 개신교의 금전적 남용은 현재 찾아보기 힘듭니다. 오스트리아 현지 교회와 성당은 본인들의 회비를 통하여 '애인 및 인 복지', '인 부모 가정 지원', '아원 및 교 관리', '원 후원' 이 네 가지의 항목을 '의무적'으로 행해야 되고 만약 자연재해 또는 대형 사고로 이재민이 발생한다면 교회와 성당 건물을 피난시설로 개방해야 된다는 의무 또한 지니고 있는데요. 만약 이를 행하지 않는다면 재직 중인 목사와 신부는 국가로부터 징계를 받고 심할 경우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지경까지 다다를 수 있습니다. 이에 더해 '신부'와 '목사'는 물론 회비로부터 수입을 얻지만 이들 또한 본인 연봉의 9%를 회비로 지출해야 되고 마치 공무원처럼 이 모든 것은 국가 관리 아래에서 수입 지급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아무리 성당 또는 교회가 수만 명의 성도들이 방문하여 어마어마한 자발적인 헌금을 받는 '대형 성당', '대형 교회'일지라도 '신부' 및 '목사'의 수입 증가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고 '회비 및 자발적인 헌금' 또한 국가와 교구가 동시에 관리하기에 '성직자의 공금 횡령, 남용, 부패'란 단어는 오스트리아에서 듣기가 정말로 힘듭니다. 국가는 종교의 독립성을 존중하고 종교는 독자적이지만 본인 또한 사회의 일원이므로 국가에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의무로 오스트리아는 종교 정책을 펼치고 있는데요. 물론 성직자들은 '따분하고 고루하고 시대에 동떨어진 직업'이라는 인식은 있지만 이런 강력한 제재로 인하여 오스트리아 국민이 '신부' 및 '목사'를 불신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약 성경에는 예수를 믿는 자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라'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저는 "어째서 예수님은 그 많은 물질들 중에 굳이 '소금'과 ''으로 비유를 들어서 이야기하였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물론 '소금과 같이 깨끗한 삶을 살고 어두운 세상에 빛이 되어라'라는 뜻으로 기독교에서는 주로 해석을 합니다만 '소금'과 '빛'보다 오히려 '다이아몬드, 금, 보석'과 같은 금은보화가 오히려 더욱 '고귀하고 깨끗하기'에 이런 비유에 더욱 적합할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금'과 '빛', 저는 이 두 가지 물질이 지니고 있는 의미가 단지 '밝고 깨끗하다'라는 해석 외에도 여러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그중 하나는 이 두 물질 모두 '흔하다'라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필수적이다'라는 것인데요. '소금'이라는 물질을 단 돈 몇 푼이면 우리는 동네 구멍가게에서도 구매할 수 있고 '빛'은 대낮이면 태양을 통해서 누구나 구할 수가 있지만 이와 동시에 '빛'과 '소금'은 우리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물질이기도 하지요.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님의 비유는 분명 누구에게나 내세울 만큼 '금은보화'처럼 겉으로 깨끗하고 값지고 화려한 존재가 돼라는 의미가 아니라 겉으로는 별 볼일 없고 흔하지만 사회에 필수적인 존재가 돼라는 의미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기독교인이라면 사회에서의 '지위' 또는 '위치'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현재 사회에서 담당하고 있는 역할로 사회와 이웃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늘 고민하고 고뇌하여야 한다는 뜻이지요. 기독교 관점에서의 '구원은 오로지 믿음'으로만이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행함'과 '증명'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늘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기독교인이라면 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창조주에 대한 경외심과 믿음'은 오로지 '사회와 이웃들이 기독교인들을 얼마나 필요로 하고 이들의 역할에 대하여 어떠한 값어치를 매기는지'를 통하여서만이 증명이 됩니다. 만약 사회와 이웃들이 '기독교인들로 인하여 눈살을 찌푸리고 그들을 본받을 수 없다'라고 이야기한다면 그들의 믿음은 겉만 번지르르한 죽은 믿음이지요. 이러한 관점에서 오스트리아의 교회는 물론 의무적이지만 사회가 필요로 하고 인정하는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참 신기한 한편 저 개인적으로는 이 모든 것들이 오스트리아의 교회가 자발적으로 행하는 것은 아니기에 반갑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오스트리아 기독교의 '행위'만큼은 귀하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