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23개의 구들로 이루어진 빈에서 중·소규모의 17구 헤르날스는 19세기 후반 빈에 편입되기 전까지 3개의 독립된 구역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구역들은 위 17구 문양의 삽화들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왼쪽 밑의 그림 같은 경우 '도른바흐'라는 구역을 상징하는 은열쇠가 새겨져 있는데, 이 열쇠는 도른바흐를 다스렸던 잘츠부르크의 성 페터 수도원을 나타냅니다. 오른쪽 밑의 삽화는 '노이발텍'이란 구역을 묘사하고 있는 집과 나무를 볼 수가 있는데요. 삽화의 집은 이 구역의 영주였던 합스부르크 황실 사무관의 관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문양에서 위에 새겨진 포도송이는 당시 자주적인 구역이었던 '헤르날스'를 의미하는데, 구역의 핵심 사업이었던 포도주를 만들기 위한 포도 재배지에서 그림이 유래되었습니다. 빈 17구 헤르날스는 잘츠부르크의 공작 지기하르트 4세가 성 페터 수도원에게 빈 알스강이 흐르는 토지를 11세기에 선사한데서부터 역사가 시작됩니다. 16세기 오스만 튀르크의 침공으로 구역 전체가 파괴된 후 이 구역의 영주들은 복구를 하면서 천주교에서 개신교로 개종을 하는데요. 이 계기로 헤르날스는 오스트리아 개신교인들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합니다. 하지만 지속되는 천주교의 핍박으로 개신교인들은 추방되고 헤르날스는 17세기에 다시 천주교로 영주가 넘어가게 되지요. 그렇게 시간이 흘러 19세기 말 수도 빈에 17구로 통합이 된 후 헤르날스는 현대화에 착수하면서 임대 주택들이 많이 들어섭니다. 이에 따라 교통 시설 또한 개발되는데, 대표적으로 헤르날스를 관통하는 귀어텔이란 빈의 핵심 순환도로가 건설되면서 빈 17구는 중심 지역구 중 하나로 발전합니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20세기 초반 오스트리아의 정권을 잡은 사회노동당이 사회주의 정책을 펼치게 되면서 전국적으로 집값이 저렴한 공립 주택이 세워지기 시작합니다. 상대적으로 임대 주택이 많았던 헤르날스는 개인 부동자산 비율 역시 높았는데 이러한 정부 정책을 강제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었는데요. 공립 주택이 들어서면서 17구의 임대 주택 집값이 폭락을 하면서 이는 땅장사를 하는 건물주들의 폭동으로 한때 이어지기도 하였지요.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20세기 중반부터 진행된 산업의 대규모 자동화에 발맞추지 못한 헤르날스는 수도 빈의 일부이지만 마치 시대에 동떨어진 외곽처럼 여겨지게 되는데요. 지역이 낙후되니 저소득층의 주거지로 변화하게 되고 빈에서 17구의 이미지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현재까지 이어져 17구는 빈에서 상대적으로 경제가 어려운 지역구에 속하게 됩니다. 하지만 빈 17구가 그렇게 부정적인 요소들만 지니고 있는 지역구는 아닌데요. 문화 및 관광적인 측면에서 빈 17구는 여러가지 볼거리들을 제공하는데, 작곡가 슈베르트가 신자로 있었던 '칼바리엔베르크 성당 (Kalvarienbergkirche)'과 바로크 건축양식으로 지어지고 17세기 신성 로마제국의 수상으로 활동했던 슈트라트만의 '노이발덱 관저 (Schloss Neuwaldegg)'등이 헤르날스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밖에 다양한 극장들 또한 빈 17구의 문화 생활을 책임지고 있지요. 경제적으로는 어렵지만 치안도 상당히 우수하고 물가도 저렴하기에 빈 17구는 사람이 거주하는 지역구로 생각처럼 나쁜 편은 아닙니다.
헤르날스 (Hernals) | |
인구 | 57.000명 (14위) |
면적 | 11.3 km² (10위) |
1인당 GDP | 약 24.000유로 (14위) |
물가 | 하 (23위) |
치안 | 상 (4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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