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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이야기/비엔나 이야기

<오스트리아 빈> 19구 되블링 / Döbling

되블링 문양

빈 19구 되블링은 19세기 말 수도 빈에 통합되기 전까지 전체 23개의 지역구들 중 한 때 가장 많은 구역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위 문양에서 보다시피 빈 19구는 총 9개의 독립된 구역들로 구성돼있었습니다. 문양에서 시계 방향으로 11시부터 살펴보면, 우선 '하일리겐슈타트'를 필두로 12시에는 '운터되블링', 1시에는 호두나무가 그려진 '누쓰도어프', 3시에는 '노이슈티프트 암 발데', 5시에 '그린칭', 6시 위치에는 '칼렌베어거도어프', 8시에 '시버링', 9시에 '쌀만스도어프' 그리고 정중앙에 이 구역들을 대표하였던 '오버되블링'의 주력 사업 중 하나였던 와인 생산을 상징하는 포도송이가 삽화로 새겨져 있습니다. 이런 삽화들에는 천주교 성인 및 성경 인물들이 주로 그려져 있는데, 이 구역들을 다스렸던 영주가 주로 천주교의 특정 교구이었기 때문이지요. 처음 되블링이란 명칭이 언급된 시기는 12세기 초반으로 알려져 있고 이 당시 빈 19구를 처음 개척하였던 민족이 슬라브 민족이었기에 슬라브어에서 '늪지대'를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4세기 되블링은 바벤베르크 한 수도회로 통치권이 넘어가면서 본격적인 오스트리아의 영토로 인식됩니다. 허나 15세기와 16세기에 습격한 헝가리 왕국과 오스만 제국으로 되블링은 폐허가 되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페스트까지 돌기 시작하여 침공으로부터의 회복도 지연되는데요. 이로 인해서 되블링은 18세기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궁핍한 지역에 포함됩니다. 그렇지만 곧이어 요세프 2세 황제가 시행한 세금 및 교구 개혁으로 수많은 토지를 소유하였던 천주교 기사단들이 해체되면서 몰수한 기사단의 재산으로 되블링을 경제적으로 되살리기 시작합니다. 19세기 초반에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황실이 돠블링의 영토를 본인들 명의로 등록하고 지번을 매기기 시작하면서 되블링만큼은 온전히 황실에서 관리하는 지역이 되면서 부유한 지역으로 거듭납니다.

칼렌산 (좌), 베토벤 생가 (우)

비엔나에서 북서쪽에 위치한 빈 19구는 비너발트 산맥 끝자락에 놓여있기에 빈을 대표하는 산들인 레오폴즈베르크와 '렌베르크(Kahlenberg)'가 위치해 있습니다. 그리고 비엔나에서 최대 규모의 화이트와인 전용 포도 재배지가 있기에 비엔나를 대표하는 백포도주는 대부분 빈 19구에서 재배된 포도들로 만들어진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19세기부터 귀족들의 휴양지로도 이용되었던 되블링은 빈에서 굉장히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치안도 좋은 지역에 포함되는데요. 이에 더하여 물가 또한 상당히 높기 때문에 빈에서 1구와 더불어 빈의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건축물, 박물관등의 직접적으로 문화/예술을 체험할 수 있는 시설은 적지만 비엔나만의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지역구 중 하나이고 특유의 아기자기하고 깔끔한 비엔나식 마을들을 경험할 수 있는 지역구이기도 하지요. 이밖에도 20세기 초반 오스트리아의 사회주의를 상징하였던 '를-마르크스-호프' 공립 주택 (Karl-Marx-Hof)과 작곡가 베토벤이 본인의 유서를 작성하였던 생가 역시 빈 19구에 위치해 있기에 역사와 문화적으로 되블링이 뜻하는 의미는 빈에서 남다릅니다.  

되블링 (Döbling)
인구 73,000 명 (13위)
면적 25km² (7위)
물가 상 (7위)
1인당 GDP 약 28.500 유로 (3위)
치안 상 (6위)

2021.08.09 - [오스트리아 일상기/장소리뷰] - <오스트리아 후기> Kahlenberg / 칼렌베르크

 

<오스트리아 후기> Kahlenberg / 칼렌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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