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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이야기/비엔나 이야기

<오스트리아 빈> 20구 브리기테나우 / Brigittenau

브리기테나우 문양

수도 빈에서 북쪽에 위치한 20구 브리기테나우는 면적은 넓지 않지만 약 8만 5명으로 상당히 높은 인구수를 자랑합니다. 공작 레오폴드 3세가 브리기테나우의 소유권을 니더외스터라이히 지방의 있는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으로 양도하면서 11세기 오스트리아의 선조인 바벤베르크 왕실이 영주로 자리매김합니다. 지역적으로 도나우 강이 지역구 오른편을 경계로 흐르고 있었고 과거에서부터 도나우 강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였기에 다른 지역과의 무역이 주로 수상에서 이루어졌습니다. 15세기 도나우 강의 물줄기 조절을 시도해 보았지만 실패하면서 강의 범람으로 온 지역이 홍수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는데요. 이어진 천주교와 개신교가 유럽내에서 주도권을 거머쥐기 위하여 일으킨 30년 전쟁으로 홍수의 피해를 본 브리기테나우의 복구는 더욱 지연됩니다. 17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합스부르크 황실의 금전적인 투자로 본격적인 지역 개발에 착수하면서 브리기테나우와 도나우 강 건너편인 21구를 이어 줄 다리들이 지어집니다. 그리고 빈 21구를 넘어서 흑해를 두고 있는 동유럽과 터키와 무역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다리를 건설하는데, 국가 간의 무역을 이어 줄 다리라는 이름에서 '츠비쉔브뤼케'로 부릅니다. 이 다리가 지닌 상징이 컸던 탓에 17세기 후반 이 다리의 명칭을 빌려서 지역명 또한 츠비쉔브뤼케로 불리게 됩니다. 위 브리기테나우 문양에서 아래쪽 삽화인 수호성인 네포무츠키의 혀가 '츠비쉔브뤼케'라는 지역을 나타내고 이 지역이 수도 빈에 통합되면서 빈 20구를 구성하는 한 구역이 되지요. 19세기 도나우 강의 물줄기를 온전히 조절하는 데 성공하면서 지역 개발이 탄력을 받기 시작하는데요. 개발을 통하여 새로운 빈 20구를 구성하는 구역이 생기면서 '브리기테나우'라는 명칭을 얻게 됩니다. 20구 문양에서 위에 그려진 삽화는 닻을 표현하는데 도나우 강에서 이루어지는 해상 무역을 뜻하고 20구를 이루는 구역인 '브리기테나우'을 상징합니다.

브리기타 성당 (좌), 도나우 강변 (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빈 20구 브리기테나우는 전체 23개의 지역구들 중 도나우 강이 인접한 이점을 살려서 증기선 산업이 발전하는데요. 도나우 강이 오스트리아 뿐 아니라 독일을 포함하여 헝가리, 슬로바키아, 세르비아 등의 다수의 동유럽 국가를 통하여 흐르기 때문에 증기선을 이용한 무역이 빈 20구를 중심으로 더욱 빛을 발합니다. 이런 수상 무역/교통을 제외하고도 체코, 폴란드 등 오스트리아의 북서쪽에 위치한 동유럽 국가들과의 육로를 통한 교류를 위해서 지어진 '서 철도(Nordwestbahn)' 또한 빈 20구에 기점을 두고 있는 관계로 브리기테나우는 현재 오스트리아와 동유럽 국가 간의 통행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과거의 무역이 발전하였어도 20세기에 터진 2차 세계 대전에서 다른 지역구들에 비해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현재의 브리기테나우는 빈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지역구에 속합니다. 그렇지만 치안도 준수하고 물가도 낮은 편인데요. 이런 이점에 더해서 '리기타 성당(Brigittakriche)' 같은 건축물과 더불어 비엔나 시민들의 여가 생활에 중심축을 맡고 있는 도나우 강이 바로 지역구 옆에 흐리기 때문에 생각처럼 사람이 거주하기에 나쁜 지역구는 아닙니다.

브리기테나우 (Brigittenau)
인구 85.000 명 (11위)
면적 5.7 km² (15위) 
1인당 GDP 약 23.000 유로 (22위)
물가 하 (22위)
치안 중 (1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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