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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이야기/비엔나 이야기

<오스트리아 빈> 16구 오타크링 / Ottakring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구성하는 전체 23개의 구(Gemeindebezirk)들 중 제 '16구'에 해당하는 '타크링(Ottakring)'에 관한 기본적인 상식을 한번 알아봅시다.

오타크링 문양

비엔나의 서쪽에 위치한 빈 16구 오타크링을 중심으로 7구와 8구가 동쪽에 17구가 북쪽에 놓여있습니다. 면적 8.7 km²인 오타크링은 인구면에서는 대규모 지역구에 속하는데 19세기 후반 빈에 통합되기 전까지 오타크링은 총 두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이들을 나타내는 삽화들이 위 문양에 새겨져 있는데, 우선 오른편에 그려진 문양은 '노이레어헨펠트'라는 구역을 표현합니다. 명칭에서부터 '레어헨'이란 참새를 뜻하는 단어가 들어가 있기에 그림에서도 참새가 날아다니는 것을 볼 수가 있지요. 그리고 왼편의 삽화 같은 경우 한 때 독립적인 구역이었던 '오타크링'을 나타내는데, 이 구역을 대표하는 상징물 또한 그려져 있습니다. 일단 삽화에서 맨 밑에 새겨진 산은 오타크링에 위치한 새개의 언덕 및 산을 묘사하고 그 위에 그려진 십자 문양과 주교관은 과거 오타크링의 영주로 군림하였던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의 상징 문양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오타크링은 빈에서도 상당히 역사기 깊은 지역구 중 하나인데요. 처음 오타크링이란 단어가 언급된 것은 9세기 독일 바이에른 공국 중 일부인 '오타허'라는 민족이 이 지역을 처음 개척하기 시작하였을 당시라고 추측하고 이 민족의 이름을 빌려서 오타크링이 탄생했다고 합니다. 중세 시대의 오타크링은 많은 천주교인들의 고해성사 및 순례지로 사용되었기에 상당히 부유하였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이어서 16세기의 발생한 오스만 튀르크의 침공으로 오타크링은 순식간에 폐허로 전락합니다. 19세기 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칙령으로 독립된 구역에서 수도 비엔나의 지역구로 통합되는데요. 여러 주거 형태와 세납 관련 정책들이 빈에 편입되면서 졸지에 변경되니 통합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켜 유혈 사태까지 이어지는 형국이 펼쳐졌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이런 반대 세력들은 저지당하고 오타크링과 노이레어헨펠트 이 두 구역은 빈에 일부로 들어가게 됩니다. 

기념전망대 (좌), 체너 마리 호이리거 (우)

19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빈 16구는 폭발적인 인구 증가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20세기 초반 인가 중가에 반하여 주거지들이 확대 및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아 다시 한번 16구 시민들의 폭동으로 이어집니다. 폭동이 지난 후 빈 시에서 주거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을 발표하면서 수십 개의 저렴한 공립 주택이 지어지게 되면서 오타크링은 현재 빈에서 가장 공립 주택이 많은 지역구에 속하게 됩니다. 또한 경제 분야에서 16구는 다양한 산업체 중 담배 및 맥주 공장이 유난히 주목을 받게 되고 오스트리아 대표 맥주 브랜드 중 하나인 '오타크링어(Ottakringer)' 맥주가 생겨나지요. 빈 도시의 절경을 즐길 수 있고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의 50년 집권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 전망대(Jubiläumswarte)'를 비롯하여 성당과 같은 여러 역사 깊은 건축물들 또한 오타크링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외에도 빈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오스트리아 전통 음식점 '너 마리 (10er Marie)' 호이리거 역시 빈 16구에 있기에 문화 체험을 위한 지역구로는 좋은 편에 속합니다. 그렇지만 경제적으로 어렵고 치안 또한 불안정한 지역구 중 하나이기 때문에 거주하기에 생각처럼 긍정적인 요소를 많이 지닌 지역구는 아닙니다.

오타크링(Ottakring)
인구 105.000 명 (5위)
면적  8.7 km² (11위)
물가 하 (20위)
1인당 GDP 약 23.000 유로 (17위)
치안 하 (15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