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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이야기/오스트리아 정보

<오스트리아 정보> 오스트리아는 과연 피해자일까?

<오스트리아 정보>

'펑'하는 폭발음이 빈 시내 한복판에 울려 퍼지고 새카만 연기가 하늘로 치솟았습니다. 거리를 지나가던 시민들은 이 광경을 보고 혼비백산에 빠졌고 국가 전체는 비상상태를 선포합니다. 대체 빈 시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때는 '1934년 7월' 빈으로 거슬로 올라갑니다. 소수의 불과하였지만 오스트리아내 간첩처럼 활동하였던 '친 나치당원'들이 수류탄과 기관총을 들고 빈 시내의 있었던'수상관저(Bundeskanzleramt)'를 습격합니다. 이유는 당시 오스트리아의 수상 '푸스 (Engelbert Dollfuß)'를 행정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친 나치당원들이 정권을 무력으로 잡기 위해서였는데요. 30년대부터 히틀러를 필두로 독일 전역을 휘어잡은 '치당(NSDAP)'은 오스트리아 내에 있는 나치당원들을 공식적인 '외교관 또는 정치가'로 인정하라며 압박을 끊임없이 해왔습니다.

부서진 수상관저 (왼), 라디오국에서 뒷수습하는 오스트리아 방위대 (오)

나치당의 횡포와 사상을 반대했던 오스트리아 돌푸스 수상은 이런 협박속에서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오스트리아를 지향하였으니 이를 본 히틀러는 늘 심기가 불편했습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에서 '반 나치주의'를 조성하는 돌푸스를 암살하라는 나치당의 명령으로 당시 오스트리아에 있는 '프리돌린 글라스' 나치 친위대장(Schutzstaffel)은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수상관저 및 라디오 방송국 (RAVAG)까지 무력으로 통제합니다.

 

오스트리아 나치당원 프리돌린 글라스 (Fridolin Glass)

이로 인해 돌푸스 수상은 사망하였고 오스트리아의 정권과 언론이 나치당으로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는데요.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트리아 경찰과 방위군들은 나치 친위대와의 소규모 전투 끝에 나치당원들을 제압하였고 당시 오스트리아 '클라스 (Wilhelm Miklas)' 대통령은 '쉬니크 (Kurt Schuschnigg)'를 새로운 수상으로 임명하였으며 나라의 안정을 점차 되찾습니다.

 

슈쉬니크 수상 (왼), 미클라스 대통령 (오)

이 사건은 '7월의 쿠데타 (Juliputsch)'로 부르며 독일 나치당에 대한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렇지만 이 7월의 쿠데타는 단순한 습격이 아니라 히틀러의 오스트리아에 대한 경고나 다름없었는데요. 이는 다시 말해 "좋은 말로 할 때 나치당으로 들어와라"라는 '최후의 통첩'이었지요. 당시 오스트리아는 무솔리니가 이끄는 이탈리아의 도음을 받으며 독일 히틀러의 압박으로부터 '자주적인 국가'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가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와의 전쟁을 필두로 세계 전역으로 영토를 무력으로 확장하려 하자 세계는 이탈리아를 고립시킵니다. 점점 세계와 단절되는 이탈리아를 본 독일 나치당은 이탈리아 편에 서는데요. 그로 인해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는 하루아침에 돈독한 관계로 발전하지요.

허나, 이 둘의 친목적인 관계를 눈앞에서 목격한 오스트리아는 절망에 빠집니다. '자주적인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의지하고 있었던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가 히틀러와 손잡는 모습을 보고 똥줄이 타기 시작하지요. 점점 오스트리아 내에서는 나치 당원들의 입김이 세지고 이제는 쿠데타로만 끝나지 않을 거라며 호시탐탐 위협을 가합니다. 그리고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수상을 '슈쉬니크'에서 오스트리아 나치 당원인 '사이쓰-크바르트 (Arthur Seyß-Inquart)'로 교체하라고 명령하지만 오스트리아 행정부는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거부하지요. 이에 한 술 더 떠, 오스트리아 슈쉬니크 수상은 끝까지 '자주적인 오스트리아'를 지향하며 독일 나치당을 배척하기 위해 1938년 3월 <나치당에 대한 대국민 찬반 투표>를 강행하지요. "지금도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나치당을 싫어한다!"라는 것을 히틀러에게 각인시키려는 이유에서 시작한 이 투표는 젊은 층에서는 '친 나치주의'가 기승을 부리자 25세 미만 청년들의 투표권을 고의적으로 박탈시켰는데요. 이 부정선거를 본 히틀러는 눈알이 뒤집히고 백만 대군을 본인이 직접 이끌고 오스트리아로 진격합니다.

독일 나치군을 환영하는 오스트리아 사람들

그런데 오스트리아로 진격하는 독일 나치군들을 대항하기는 커녕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나치 깃발'과 '꽃'을들며 환영하는데요. 이는 오스트리아가 자주적인 위치를 더 이상 고수할 수 없게 되자 항복의 의미로서 환영을 하였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오스트리아 행정부는 진격한 히틀러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슈쉬니크 수상을 바로 해임시킵니다. 그리고 독일 나치당원의 '철저한 감시'속에 <나치당에 대한 대국민 찬반 투표>를 진행하였고, 결과는 당연히 오스트리아 국민들로부터 99.7%의 압도적인 찬성표를 얻고 오스트리아는 자연스럽게 독일 나치당에 합병되지요.

금까지의 스토리만 본다면 오스트리아는 단지 '비운의 주인공'마냥 이리 끌려가고 저리 끌려다니며 독일 나치당의 철저한 '제1 피해자'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패한 독일 나치당을 끝까지 배척한 오스트리아를 대 다수의 사람들은 전범국이 아니라고 인지하지요. 하지만 과연 실제로도 그럴까요?

첫 번째로, 겉으로는 아닌척하지만 오스트리아는 과거 신성로마제국 시절부터 독일과에 연합을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내심 원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나폴레옹'한테 뒤지게 처맞은 신성로마제국은 해체되고 독일과 문화와 언어를 공유하는 오스트리아는 미래 지향적인 관점에서는 독일과에 연합은 이점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범 독일적 해결방안 (Großdeutsche Lösung)'을 채택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오스트리아와 독일 연합국의 왕좌는 누가 차지하느냐 하며 다민족의 '오스트리아 스부르크'와 순수 독일인들로 구성된 '로이센'은 왕좌의 자리를 놓고 심하게 다툽니다. 결국에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패배로 끝나고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 제국을 제외한 '순수 독일 민족'의 연합국인 '일 제국'을 건국하지요. 그리고 20세기 초반에 터진 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는 실패하고 자신들 통치 아래에 있었던 다른 동유럽 국가들이 하나 둘씩 독립해 나가면서 오스트리아는 굉장한 소국으로 전락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오스트리아 제국이 붕괴되고 오스트리아는 '공화제'로 전환하지요. 과거의 명성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오스트리아는 독일과의 연합에 더욱 집착하지만 만약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합칠 경우 유럽에서 일방적인 초강국이 탄생하므로 프랑스를 필두로 여러 주변 유럽 국가들의 반발로 무산됩니다. 이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1차 세계대전 패전국으로서 전쟁에 대한 배상을 해야 했던 오스트리아와 독일은 심각한 경제난 또한 겪게 되지요. 그리고 이런 경제난 속에서 히틀러가 독일의 총통으로 올라섭니다.

오스트리아 돌푸스 수상 (Engelbert Dollfuß)

두 번째로, 우리가 오스트리아에 대해 크게 간과하고 있는 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오스트리아 수상 '돌푸스'의 실체인데요. 방금 전 돌푸스 수상은 나치당을 배척하다가 암살당한 인물이라고 말씀드렸었죠? 이렇게만 보면 굉장히 깨끗하고 올바른 정신을 갖고 있는 수상으로 생각이 될 텐데, 이 수상은 실제로는 오스트리아식 '극우적 수주의'로 똘똘 뭉친 인물이었습니다.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호위로 자신만의 권위주의를 위해 돌푸스는 '조국전선 (Vaterländische Front)'이라는 정당을 앞세워 '오스트리아식 시즘 (Austrofaschismus)'을 전개시키려 하지만 이를 정면에서 반박하는 단체가 있었습니다. 바로

'독일 나치당'

눈엣가시였던 나치당을 돌푸스는 오스트리아 내에서 해체시켜 버리고 이에 빡돌은 히틀러는 1934년 쿠데타로 돌푸스를 암살합니다. 수장이 사망하고 이를 후원하던 이탈리아도 독일 쪽으로 노선을 변경하니 '오스트리아식 파시즘'은 흐지부지하게 막을 내리지요. 물론 히틀러처럼 '반유대적인 사고'를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돌푸스 역시 히틀러 못지않은 '인종주의적이며 권위주의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한마디로 "독일식 국수주의(나치당)가 오스트리아식 국수주의(조국전선)를 찍어 눌렀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네요.

모스크바에서 서명하는 미국, 소련, 영국의 외무부 장관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43년에 있었던 '모스크바 선언 (Moskauer Deklaration)'에서 승전국이었던 '국, 국, 련'은 독일을 상대로는 엄격한 '처벌'과 '배상'을 원한것에 반해 오스트리아한테는 '재발방지'라는 명목으로 주의조치만 내려집니다. 이유는 오스트리아의 독일 나치당 합병이 '강제적이며 타의적'이었다는 점에서 비롯되었는데요. 승전국 중 유일하게 '영국'만이 오스트리아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주장하였지만 미국과 소련은 이에 반대합니다. 겉으로는 뭐 "전범국으로서의 명백한 증거가 없다는 둥, 오스트리아를 미래의 중립국으로 키울 거다라는 둥" 오만 핑계를 대면서 미국과 소련은 오스트리아를 순수 전쟁 '피해국'으로 정하는데요. 이런 '핑계'의 뒷면에는 전쟁에 승리한 미국과 소련이 오스트리아의 자원과 과학기술들을 갈취하려는 속셈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오스트리아는 전쟁을 패한 후 (미국과 소련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우리는 나치당의 피해자입니다"라는 이미지 메이킹을 시도하고 이것이 전 세계인들에게 제대로 먹혀들어 지금 현재까지 대다수의 사람들이 "오스트리아는 전범국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게 되지요.

참고로 독일어 중 '오퍼테제 (Opferthese)'란 단어가 있습니다. '피해자 또는 약자 이론'이란 의미로 독일어권에서는 심리학적 용어로도 쓰인다고 하는데요. 대체적으로 인간은 무의식 중에 약자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와 명예를 가진 사람들로부터 통치를 받는 피 권력층인 일반 '서민들은 양심적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순수하며, 피해자는 항상 옳다' 즉, '사회적 약자는 강자보다 선할 것'이라는 일종의 고정관념을 뜻합니다. 이는 쉽게 말하자면 '가난은 단순히 금전이 없다는 것이지 금욕 또한 없다는 뜻이 아니고, 모든 사람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고 살인자가 피해자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독일이라는 '악인'을 옆에두고 자신은 깨끗하고 피해자라며 '위선'을 떨고 있는 오스트리아를 보면서 이 '약자 이론'에 가장 적합한 예시가 오스트리아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오스트리아가 독일처럼 무조건 모든 면에서 배상하고 사죄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사과는 못 할 망정 '피해자' 역할을 자처한다는 점은 한 나라의 국수주의로 무고하게 학살된 천만 명의 시민들을 조롱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