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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이야기/오스트리아 정보

<오스트리아 정보> 히틀러 그대가 이 편지를 읽어 주었더라면...

<오스트리아 정보>

아마도 20세기 가장 파장력이 컸던 인물을 딱 한 명만 뽑아보라고 한다면 이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치 독일의 독재자, 6백만 명 이상의 유대인을 죽인 학살자,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의 주범 '돌프 히틀러(Adolf Hitler)'. 무엇보다도 상당히 많은 분들이 이 독재자를 독일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히틀러의 출생지 (붉은 점)

 

실은, 오스트리아 서부에 오버외스터라이히 (Oberösterreich)란 지방의 '라우나우 암 인 (Braunau am Inn)'이라는 한 작은 마을에서 19세기 후반에 태어났는데요. 이는 독일 국경과 불과 약 5km밖에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수많은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매번 "아, 5km 멀리 떨어져 태어나지..."라면서 한탄을 한다고 하네요 ㅎㅎ

(그밖에 베토벤은 오스트리아 사람, 히틀러는 독일 사람이라고 이상한 자기 합리화도 하지요 ㅎㅎ)

유년기 시절 히틀러

 

히틀러의 부친은 지방 세무서에서 일한 덕에 히틀러 집안은 그렇게 어려운 가정은 아니었습니다. 초등교육도 웬만한 중산층이 다니는 학교에서 마칠 정도였으니까요. 비록 금전적인 여유는 있었을지 몰라도, 가정은 불행하였습니다. 이유는 바로 히틀러 아버지 때문이었는데요.

 

히틀러 부친 알로이스 히틀러 (Alois Hitler)

시도 때도 없는 아버지의 욕설과 폭언, 걸핏하면 손부터 나가는 폭력적인 행동으로 어린 히틀러에겐 심각한 정신적인 상처를 입힙니다. 그리고 내성적이었던 히틀러의 성격은 아버지로 인하여 '폭력성'까지 얻게 되는데요. 성인 히틀러의 '편협적인 증오심과 민족 우월감' 등 이런 발작적인 성격은 어렸을 때에 아버지에게 입은 상처에서 기인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14세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는 어린 내성적인 히틀러에겐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는 린츠 실업학교에서 그럭저럭 성적을 유지하던 히틀러가 자퇴까지 하는 방황으로 이어지게 만듭니다.

 

히틀러가 그렸다는 수채화

이런 히틀러에게도 어릴 적 꿈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가'인데요. 16세 때 오스트리아 린츠 (Linz)라는 도시에서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 (Richard Wagner)'의 오페라 '리엔치 (Rienzi)' 공연을 보았던 히틀러는 이에 빠져서 처음에는 음악가가 되려고 했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는 평생 동안 바그너 애호가로 자칭하지요.

하지만 음악적 재능이 없었던 히틀러는 이를 단념하고 본인이 느끼기에 그림에 소질이 있는 것 같아 '화가'가 되려고 결심합니다. 아버지를 잃은 후 더 이상 저지할 사람이 집안에 없었기에 16세의 방황하는 히틀러는 꿈 하나 품고 무작정 오스트리아 빈으로 상경을 합니다.

 

20세기 초반의 빈 국립 미술원 (Akademie der bildenden Künste)

들뜬 마음으로 '빈 국립 미술원'에 입학시험을 치른 히틀러에게 돌아온 건 '부족한 데상 실력'이라는 평가와 함께 시험을 보기 좋게 낙방합니다. 그렇지만 이를 포기하지 않았던 히틀러는 그다음 해에도 빈 국립 미술원에 도전하지만 결과는 같았지요.

그러나 본인 그림 실력을 꽤나 높이 평가했던 히틀러는 몹시 빡쳐(?) 자기를 떨어트린 입학 시험관한테 가서 다짜고짜 따지는데요.

히틀러에게 인생의 쓴맛을 알려준 시험관 크리스티안 그리펜케를 (Christian Griepenkerl)

당시 시험관이었던 그리펜케를 교수는 막무가내로 따지는 히틀러에게 (불쌍하게 여겼는지) 건축학에 도전해 보라고 권유하지만 건축학 공부를 하려면 고등학교 졸업장이 필요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순진한 히틀러는 건축학 입학에 도전을 하려 하지만 방황으로 자퇴한 히틀러에겐 졸업장이 없었지요.
(히틀러를 두 번 죽인 장본인 ㅎㄷㄷ...)

건축학 입학 '도전'조차 불가능했던 히틀러는 이에 낙심하고 일반 학과목으로 전향하러 하지만 또다시 '고등학교 졸업장 여부'가 발목을 잡습니다. 빈에서 낙방 후 화가의 꿈을 이루려고 프랑스 파리로도 가봤지만 본인의 화풍이 '너무 건조하다'라는 평을 듣고 실패하지요.

그리고 이때 히틀러 본인이 가장 의지했던 어머니마저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이로 인해 가뜩이나 빡돌아있던(?) 히틀러는 사회에 대해 더욱 삐뚤어지지요.

하지만 웃긴 건 본인을 떨어트렸던 그리펜카를 교수조차 자서전 <Mein Kampf>에서 유대인이었다고 헛소리를 하고 실업난은 맞지만 실제로는 아버지와 외가 쪽에서 물려준 재산으로 금전적인 여유가 있었던 히틀러는 과대망상으로 "나는 20세기 초반 오스트리아 경제를 쥐어 잡고 있던 유대인 때문에 경제난과 실업난을 겪었다"라는 희대의 망언까지 내뱉습니다.

이런 망상을 했던 걸로 보아, 유년기 시절 '아버지한테 입은 상처, 지속되는 입학시험 낙방,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사망'등으로 히틀러의 정신세계가 피폐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이에 더해 '편협적인 사고, 책임 전가'로 똘똘 뭉친 히틀러는 극단적인 국수주의로 빠져들고 결국에는 후에 독재자의 길을 가게 되지요.

 

그러나

 


역사에 알려지지 않았던 엄청난 반전이 최근 발견되었는데요.

빈 국립 미술원에서 보낸 합격 통지서

 

히틀러는 계속되는 입학시험 불합격에 '실망과 좌절'을 했다고 했지, '미술가'의 꿈을 완전히 단념하지는 않았습니다. 1907년, 히틀러가 17세 때에 빈 국립 미술원에 다시 한번 물을 두들기는데요.

시험 후 입학 결과를 기다렸던 히틀러는 통보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미술원으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자 히틀러는 또다시 '불합격'했다고 스스로 치부해 버리는데요. 그로부터 107년 후 2014년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살고 있는 욀메츠라는 주민은 어느 날 자기 우체통을 확인해 봤는데 이상한 편지 하나가 놓여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내용은 즉슨:

"히틀러 귀하 (1907년 10월 2일)
본인의 빈 국립 미술원 입학시험에
시험단은 긍정적인 평가를 내려 합격이라는
결정을 내렸음을 이로써 통보합니다.
[...]
시험단 대표
크리스티안 크리펜케를 교수"


이 편지 내용을 수상하게 여긴 욀메츠라는 주민은 곧바로 우체국에 항의를 합니다. 이에 오스트리아 우체국으로부터 들은 해명은 가히 충격적이었는데요.

1907년 당시 오스트리아 우체국은 우편물 발송을 우편물의 종류의 따라 진행했었습니다. 입학통지서는 원래 '긴급 우편물 발송'이라는 관할 부서로 넘어갔어야 되는데 '교육부서'라는 관할로 잘못 넘어가고 이를 찾던 '긴급 우편물 발송' 부서는 이 통지서가 없어지자 '분실'로 무책임하게 치부해 버립니다.

그로부터 수십 년 후 오스트리아 우체국의 나눠 저 있던 부서들은 통합이 되고 과거 '교육부서'에 남아있던 히틀러의 입학통지서가 발견되고 통지서 봉투에 적혀있는 주소로 비로소 107년 후에나 발송됩니다. 그리고 약 100년 전 히틀러와 모친이 살았었던 주소에 2014년 현재 욀메츠라는 새로운 주민이 들어가서 살게 되었고 우연하게 이 통지서를 받게 된 것이었죠.

100년 전 당시 '빈 국립 미술원'은 유럽 내 최고의 미술원 중 하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합격통지서가 사실인지는 모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허구'같지만 만약 사실이었고 미술원을 졸업만 하였다면 화가는 물론 디자이너 또는 여러 다방면의 상업적 예술인력으로 충분히 이름을 알릴 수 있었는데요. 물론 이 미술원을 '졸업하였다'해도 히틀러의 삐뚤어진 사상을 온전히 바꿀 순 없었더라도 최소한 이 통지서가 100년 전 히틀러 본가 주소로 제대로 전달만 되었더라면

천만 명의 무고한 시민 학살
1억 명의 사상자를 낸 전쟁


최소한 이 두 가지는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